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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영화사 |
205~222p |
2010년 11월 5일 |
혁명 전 러시아 영화
유리 치비안
러시아 영화 제작은 장비 산업 분야가 아닌 수입업자와 배급업자, 혹은 극장주에 의해 시작되었다. 1906~7년경, 모스크바와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영화 상영관들은 사용한 필름을 다른 지방에 대여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배급 시스템이 정착하는 과정에서 러시아 최초의 국내 제작 영화가 출현하였다.
전략
경쟁사의 영화가 개봉되기 직전이나 동시에 같은 주제의 값싸고 너절한 영화를 배급하는 <혼란>전략과 양질의 영화를 추구하는 <경쟁>전략이 있었다.
스타일
스타일의 관점에서 보면, 혁명 전 러시아 영화제작은 1913년을 전후로 나뉜다. 최초의 국내 영화 <스텐가 라진 Stenka Razin>이 제작된 1908년부터 1913년까지는 한존코프와 파테-페레, 두 영화사에 의해 이끌어졌다. 1910년까지 파테-페레는 필름 다르 양식, 한존코프는 러시아 고전 문학을 영화화 하는 스타일을 가졌다.
1911년부터는 러시아 영화는 덴마크와 이탈리아의 살롱 멜로드라마의 영향 아래에 놓인다. 영화의 공간은 과거에서 현재로 시골에서 도시로 이동한다. 그렇게 진지한 전통 드라마는 퇴폐적인 분위기의 복잡한 멜로드라마에 길을 내주게 된다. 1913년 <행복의 열쇠 The Keys to Happiness>는 티만/라인하르트 스튜디오를 부각시키며 러시아 스타일의 한 축을 구성한다.
1차 대전으로 영화 수입이 봉쇄되면서 러시아 영화는 황금기를 맞이한다. 1914~16년 동안에 내면적이고 느린 연출 방식이 계발되었다. 1917년 이후에는 소비에트 문화가 지향하는 바에 맞추어 잘 구성된 플롯과 빠른 이야기 구조가 문학과 영화에서 중요시된다.
개인
러시아에서 사기업의 영화 제작이 최고조를 이루던 시기(1914~19)에는 영화 팬의 역할이 증가했다. 배우들이 부각되고 영화 전문지와 팬 잡지들이 출현하기 시작한다. 이에 따라, 개인적인 경력을 갖는 <영화감독>이라는 개념이 형성되었다. 이 때의 감독으로는 표트르 차르디닌, 야코프 프로타자노프, 브와디스와프 스타레비치 등이 있었다.
소비에트 연방과 망명 러시아 인들의 영화
나탈리아 누시노바
영화와 혁명
소비에트 영화는 공식적으로 1919년 8월 27일 탄생했다. 이 시점에 사유 영화사와 사진업체의 국유화가 시작된다. 국유화 초기에는 대형 영화사들을 대상으로 진행되었기에 개인 영화사와 국가 소유의 영화사가 공존했다. 소비에트 영화 제작은 5~6개의 영화사를 근간으로 인민교육위원회의 사진 영화 분과가 통제하는 체계였다. 창작 과정에서 이데올로기적인 통제가 있었고, 몇 개의 기관이 배급 및 수입, 수출에 대한 완벽한 독점권을 소유했다
망명 러시아 인들
망명 러시아 인들은 프랑스 파리, 이탈리아, 독일, 체코슬로바키아 등으로 망명했고, 1920년대 후반에는 할리우드로 활동 중심을 옮기기도 했다. 이들은 혁명 이전의 러시아 스타일을 보존하려고 노력했기 때문에 매우 보수적이었다. 하지만, 점차 그들의 입장을 포기하도록 강요되었다.
소비에트 양식
소비에트 양식은 혁명 전 유산과의 완전한 단절을 원했다. 그리고 급변하는 혁명의 사실성을 추구하기 위해 몽타주를 통해 영화적 표현을 변형시키려 했다. 사실 부분적으로는 경제적 필요성에 의해 몽타주가 시작되었다. 생 필름의 공급이 부족했기 때문에 옛날 영화를 재편집하는 것으로 영화를 제작해야 했다. 이러한 환경 속에서 블라디미르 가르딘에서 시작된 몽타주 기법이 레프 쿨레쇼프에게 이어졌고, 푸도프킨과 에이젠슈타인 그리고 다큐멘터리의 시초라는 베르토프에 의해 발전되었다.
1920년대에는 집단 창작, 무대-스크린의 혼합, 군중이 주인공인 것이 일반적이었다. 사회주의적 체제의 목표에 따라 다양한 실험을 했고, 그 속에서 찰리 채플린과 그리피스의 영향은 상당했다.
연극적 영화와 비연극적 영화의 논쟁을 어느 정도 초월한 새로운 기법들의 혼합이 1920년도 중반에 <혁명적 역사 서사시>가 발전하면서 나타났다. 이 범주의 영화들은 비전통적인 플롯 구성과 이야기, 강렬한 몽타주, 풍부한 은유와 영화 언어 사용 등의 특징을 보이며, 혁명적 주제들을 다루어 사회적, 이데올로기적 요구를 완수하기 위한 목표가 뚜렷했다.
1926년부터는 시나리오의 역할에 대한 논쟁이 일어났다. <강철 시나리오>와 이에 대항하는 <정서적> 시나리오, <충동의 속기록>개념이 제안되었다. 이러한 과정에서 형식주의 작가와 비평가들의 개입은 소비에트 영화의 문학적 가치를 일정하게 통합시킬 수 있도록 이끌었다. 그리고 이어서 주변 현실에 대한 세밀한 관심을 표현하는 <일상 장르>가 소비에트 영화에서 지배적인 위치를 차지하게 된다. 1920년대 말에는 몽타주 영화는 여러 개의 최고점에 도달하고, 그 속에는 다양한 경향들이 혼재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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