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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영화사 |
옥스퍼드 세계영화사 36p~70p 요약 |
2010-0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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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창기 영화
영화출현(1895)~1906년에 이르는 시기의 영화를 <초창기 영화>라고 부른다. 그리고 1907년~1910년대 중반까지를 <과도기>라고 규정할 수 있다. 초창기 영화는 매우 직접적인 재현 양식들을 사용했고, 과도기에 들어서 영화가 다른 것과 구별되는 형태의 서사적 환영 narrative illusi-on을 창조할 수 있는 수단을 확보할 수 있었다.
산업
영화는 정확한 기원의 순간을 갖고 있지 않다. 영화가 탄생하기까지 16세기 카메라 옵스큐라 실험, 19세기 초 다양한 광학 장난감이 있었고, 19세기의 마지막 10년 사이 움직이는 이미지를 스크린에 투영하고자 하는 노력이 더해졌다. 뿐만 아니라 촬영 기술의 향상, 셀룰로이드의 발명, 영사기 설계에 정밀 기계 공학 적용 등 기술적인 배경도 영화탄생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최초의 영화 상영 시기는 에디슨이 키네토스코프를 처음 완성한 1893년부터 뤼미에르 형제가 그랑 카페에서 실연한 1895년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게 잡을 수 있다. 실제로 독일의 막스 스클라다노프스키가 뤼미에르 형제보다 2달 앞서 같은 일을 했지만, 뤼미에르 형제의 상업적 재능과 마케팅 능력으로 인해 영화 역사의 최초자리는 뤼미에르 형제라고 알려지게 되었다. 뤼미에르 형제의 <시네마토그래피>는 카메라, 영사기, 필름 현상기 등으로 기능할 수 있었고, 상대적으로 가벼운 무게로 휴대와 작동이 용이했다. 뤼미에르 회사가 미국에 상륙하면서, 에디슨의 키네토그래프를 몰아냈다.
주로 다큐멘터리적인 내용들을 상영했던 뤼미에르의 시네마토그라프가 프랑스에서 주도권을 확립했으나 영화 초창기에 같은 프랑스 인인 조르주 멜리에스는 픽션 영화의 세계적인 제작자가 되었다. 멜리에스의 스타 영화사는 1896년에 제작을 시작했고, 이듬해 봄에 파리에 스튜디오를 마련했다. 멜리에스는 1896년과 1912년 사이 수백 편의 영화를 제작했고, 1903년에는 뤼미에르 형제를 영화 산업에서 거의 몰아낼 정도였다. 하지만, 1908년에는 영화들이 전혀 다른 종류의 오락을 제공하면서 기울기 시작했고 1913년에 파산에 이른다.
파테 영화사는 초창기 영화사에서 가장 유력한 프랑스 영화사 가운데 하나였고, 프랑스의 초창기 영화 시장 지배에 주요한 역할을 했다. 1896년 설립해서 1902년 뤼미에르의 특허를 획득했고, 1차 세계 대전 이전에 멜리에스 회사를 인수했다. 또한, 해외 진출을 확대하여 새로운 시장을 개척하였다. 1908년에는 미국 제작사들의 영화를 합친 수의 두 배에 이르는 영화를 배급하기에 이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의 제작사들도 미래를 위한 단단한 기초를 구축했다.
영화의 <발명>은 에디슨을 연상시키지만, 사실 그의 연구소에서 영국인 딕슨의 감독하에 일했던 연구진이 제작했다. 1889년 영화에 대한 연구를 시작했고, 1893년 키네토그래프와 키네토스코프를 건조햇다. 키네토스코프는 크고, 무거워 이동이 어려웠기 때문에 필요했던 최초의 영화 스튜디오 <블랙 마리아>를 개발하여 건조했다. 이 스튜디오에서 주로 보드빌 공연자들이 와서 댄서나 근육맨 등의 공연을 재연했다.
에디슨은 비록 개별 관람이었지만, 최초로 상업적인 가능성을 가진 영화 관련 기계를 판매했다. 이어서 에디슨은 키네토스코프 가게를 설립(1894)했고, 이것은 사람들을 열광시켰다.
1896년 봄까지 에디슨 영화사는 키네토스코프 용도의 영화 제작에 몰두했지만, 키네토스코프의 인기는 계속해서 떨어졌다. 이에 토머스 아맛과 프랜시스 젠킨스가 중심 메커니즘을 설계했던 영사기-바이타스코프에 관한 특허를 확보했다. 그리고 미국 전역에 걸쳐서 바이타스코프로 영화를 상영했다.
에디슨의 주요 경쟁자였던 제임스 스튜어트 블랙튼과 앨버트 스미스는 1898년 바이타그래프 영화사를 세운다. 당시 미국-스페인 전쟁의 발발하자, 전쟁상황을 전달할 영화를 제작하였고 이러한 시도는 크게 성공한다. 그리고 1900년경에는 미국의 주요 영화 제작사로 자리매김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리피스를 고용했던 사실로 유명한 아메리칸 뮤토스코프-바이오그래프 영화사는 당시 3번째로 중요한 영화 제작사로 1895년 뮤토스코프 기계를 위한 플립카드를 생산하기 위해 설립되었다. 딕슨이 에디슨을 떠나 바이오그래프에 합류했을 때, 그의 기술을 이용해서 뛰어난 품질의 영사기를 개발하였고, 이 영사기는 뤼미에르 영사기를 빠르게 대체해 나갔다. 바이오그래프 또한 1897년 영화를 제작하기 시작했으나 에디슨 영화사는 바이오그래프에 대해 1902년에 가서야 해결되는 소송을 제기해서 결국 바이오그래프를 시장에서 실질적으로 제거했다.
영국은 세 번째로 중요한 영화 제작 국가였다. 에디슨의 키네토스코프는 해외 특허를 획득하지 못했기 때문에, 영국인 폴은 법적으로 정당하게 키네토스코프를 모방하였다. 이에 에디슨이 영화공급을 중단하자, 폴은 직접 영화 제작에 착수하였다. 1899년 버트 에이커스와 함께 영국 최초의 스튜디오를 열었다. 또 다른 영국 영화의 주요 제작자인 세실 헵워스는 1900년 스튜디오를 세웠다. 1902년 즈음, 브라이튼은 몇몇 스튜디오 운영자에 힘입어 영국 영화 제작의 중심지가 되었다.
이 시기의 제작, 배급, 상영 등 모든 것은 영화 제작사의 독점적인 영역이었다. 영화 제작사들은 필름을 대여하기보다 판매했고, 이것이 상설적인 상영 장소의 발전에 저해 요인이 되었다.
이 시기의 영화 생산은 단순 협업적이었다. 회사를 경영하면서 영화 제작에 관련된 다양한 일들을 담당하였고, 촬영과 연기로 나뉘어 작업을 분담하기도 했지만 경계가 모호했고, 정립된 방식도 없었다. 현대적인 의미에 따른 최초의 진정한 감독은 1903년 바이타그래프 영화사에서 도입된 것으로 추정된다.
양식
초창기의 영화는 사람의 신체가 전부 보이도록 멀리 카메라를 설치했다. 이러한 롱 숏 스타일은 타블로 숏, 프로시니엄 아치 숏이라 불렸다. 이러한 시점은 연극에서 영감을 얻어온 것이었다.
초창기 영화 제작자들은 숏 사이의 연결에 대해서는 무심했다. 연속적인 선형적 내러티브를 구성하기 위한 관습, 관객이 시공간적 맥락을 잃어버리지 않도록 하기 위한 관습들이 정립되지 않았다. 그러나 1902년까지는 드물었지만, 복수 숏 영화들도 있었다. 1902년을 기준으로 전에는 단일 숏이 지배적이었고, 이후에는 인과적, 시간적 관계로 구성된 단순한 내러티브를 가진 복수 숏의 픽션 영화들이 점차 지배적이 되었다.
초창기 영화는 내러티브보다는 시각적 스펙터클로써 관객에 흥미를 끌었다. 톰 거닝은 <볼거리로서의 영화>였던 초창기 영화와 <내러티브 통합의 영화>라고 할 수 있는 과도기적 영화를 구별했다.
1894~1902/3
이 시기 가장 중요한 프랑스 영화 제작자들인 뤼미에르 형제와 멜리에스의 작업은 단일 숏 영화에 관한 모범적인 예를 제공한다. ‘역에 도착하는 기차’와 ‘공장에서 퇴근하는 근로자들’ 같은 영화 내용에서 알 수 있듯이, 당시에 관객들은 스토리를 요구하지 않았고 단순 기록이 움직임으로 재현되는 것에 큰 매력을 느꼈다.
그러나, 뤼미에르 형제는 첫 영화에서 일종의 스토리 영화도 포함시켰다. ‘물에 젖은 물 뿌리는 사람’은 카메라를 위한 특별한 장면을 연출하였다. 눈여겨볼 점은 등장인물들이 화면에서 사라지는 순간에도 카메라는 움직이기 않고, 스토리의 인과성과 시간성에 우선하여, 그대로 사건의 공간을 보존했다는 것이다.
뤼미에르 형제와 달리 조르주 멜리에스는 카메라를 대상으로 사건을 연출하여 촬영하였다. 실제로는 잃어 날 수 없는 등장인물이 갑자기 화면에 나타나거나 사라지는 연출을 하였다. 이것은 편집을 통해 제작되었다. 또한, 멜리에스는 한 숏 위에 다른 숏을 겹치는 방법을 통해 이미지를 조작하기도 했다.
이러한 영화적인 조작에도 불구하고, 멜리에스의 영화들은 많은 측면에서 연극과 유사한 것으로 1907년 이전 많은 픽션 영화들의 공통적인 특징이다.
1907년 이전 시기의 많은 영화들은 기록과 재연을 섞어서 사용했다. ‘오번 교도소 전경 속의 촐고슈 사형’을 보면, 처음 2개의 숏은 교도소 외부 전경으로 기록해 해당하고, 다음 2개의 숏은 재연에 해당한다.
20세기의 문턱에서 제작된 많은 영화들은 여행과 교통에 대한 당시의 지대한 관심을 반영했다. 기차의 앞에 카메라를 설치해서 이동 숏을 얻었고, 이를 통해 만들어진 영화들은 하나의 장르를 형성했다. 기차 영화 장르는 여행 영화와 연관되었다. 여행 영화는 이국적이거나 친숙한 풍경을 특징적으로 보여주었는데, 이 시기에 매우 인기였던 그림엽서와 입체화를 모방한 것이다. 퍼레이드, 만국 박람회, 장례식 등의 공개 행사들도 초창기의 카메라맨들에게 풍부한 소재가 되었다. 또한, 초창기 영화 제작자들은 보드빌 공연이나 권투 시합 같은 대중적 오락물을 본떴다. 비슷하게 연극 극단들의 공연을 영화적으로 기록한 예수 수난극도 있었다. 세 번째 분야의 영화들은 유머러스한 속성을 가진 짧은 스토리의 영화였다. 이 분야의 영화들은 카메라 앞에서 코믹한 행위를 벌이는 개그 영화와 트릭효과를 통한 유머에 의존한 영화가 있었다.
1902/3~1907
이 시기에는 복수 숏이 정례로서 등장했다. 하지만, 서사적 인과성을 구축하거나 시간과 공간의 맥락을 분명하게 하기 위해서라기 보다는 사건의 중대한 시점을 포착하고 강조하기 위해 숏들의 연쇄를 사용하였다. 즉, 서사의 발전보다는 시각적인 쾌락을 강화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 시기에 사용된 가장 강력한 편집 장치의 하나는 행동의 중복이었다. 이는 카메라 앞의 공간을 유지하면서, 동시에 중요한 행동을 궁극적으로 두 번 보여줌으로써 그 행동을 강조하려는 제작자들의 욕구에서 비롯되었다.
행동의 중복이 숏들을 연결하는 일반적인 수단이었던 상황에서 이 시기의 영화 제작자들 또한 시간과 공간의 맥락을 설정하는 다른 수단들을 실험했다. 이 외에도 디졸브, 매치 컷 등으로 숏을 연결하는 방법을 시도한다.
1907년 이전의 <볼거리로서의 영화>가 취하는 편집 전략은 서사적인 이해를 위해서보다는 관객의 사각적 쾌락을 강화하기 위해 고안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영화들도 대부분 간단하지만 스토리를 말했고, 관객들은 확실히 서사적인 즐거움까지 누렸다. 시공간적인 맥락과 선형적 서사를 구축하기 위한 전략의 부재에도 불구하고 관객들은 영화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었다. 이것은 영화가 관객들의 지식에 크게 의존하였기 때문이다. 또한, 당시 영화는 유아기로서 다른 형태의 대중 오락물의 서사적, 시각적 관습을 끌어다 사용하였다. 한편, 영화제작자들은 관객에게 널리 알려진 스토리들로부터 많은 영화를 끌어내기도 했다.
상영
미국에서 초창기 영화 관객들은 이질적이었고, 어느 한 계층이 주도적이지 않았다. 따라서, 각각에 맞는 여러 장소에서 상영되었다. 보드빌 극장, 지방 교회, 오페라 하우스, 천막, 거리 점포 등이 있었다.
상영장소가 어디든 상영업자들은 영화의 내용을 상당히 통제했다. 영화 제작자들이 제공한 개별 영화를 짜맞추어 프로그램을 만들었다. 영사기의 성능 향상으로 상영업자들은 12편 이상의 필름을 이어 붙여 특별한 주제에 관한 프로그램을 만들기 시작했다. 상영업자들은 시각적 측면들을 조정할 뿐 아니라 다양한 종류의 사운드를 추가했다. 무성영화는 전혀 무성이 아니었고, 오케스트라, 피아노 솔로 등 모든 영화에 음악이 수반되었다. 그 외에도 다양한 이미지를 첨부하거나, 심지어 효과음과 대사를 즉석에서 추가하기도 했다.
영화는 출현 이래 10년이 지나갈 즈음, 20세기의 많은 오락거리 하나로 자리매김했다. 그럼에도 형식적인 관습과 스토리텔링 장치에 있어 기존의 다른 매체에, 다소 시대에 뒤진 개인들 중심의 제작 방식에, 기존의 상영 장소에 크게 의존했다. 그러나 그 다음의 10년 동안 영화는 커다란 진전을 이루어 나름의 고유한 형식적 관습, 산업 구조와 상영 장소를 완비한, 20세기의 진정한 대중 매체로 확고하게 자리를 잡게 된다.
과도기 영화
산업
제 1차 세계 대전 이전에는 유럽 영화가 국제 시장을 주도했다. 미국 영화사들은 자국 시장에서 유럽 영화 상품의 도전에 직면했다. 미국 영화 제작사들은 우선적으로 자국 시장에 집중했지만, 나중엔 국제적 진출을 시도했다. 이 후, 유럽 기업이 전쟁의 여파로 움츠러들고 있는 1914년에는 1위의 자리에 올라선다. 1907년 바이타그래프사를 선두로 다른 미국 제작사들도 1909년에 런던에 진출한다. 그 결과, 영국 산업은 자국의 주도권을 미국에 양보하면서 제작보다는 배급과 상영에 집중하게 된다. 독일도 비슷한 양상으로 미국에 시장을 내주지만, 프랑스와 이탈리아 내에서는 경쟁할 힘이 부족하였다.
이 기간에 미국의 영화들은 주로 미국 동부 해안 지역에서 제작되었고, 시카고에 1~2개의 지부가 있었으며 몇몇 영화사는 서부와 해외까지도 진출했다.
1903년을 전후한 영화 거래소의 증가는 배급 방식에 커다란 변화를 가져왔으며, 상영 방식의 급격한 변화를 야기했다. 1906년부터 등장하기 시작한 니켈로디언과 같은 영구적인 상영 장소의 급증은 영화 산업의 수익성을 끌어올렸다. 영화를 판매하는 방식은 상설 상영 장소에게 부담을 주었고, 이에 영화 거래소가 등장하여 영화를 구매한 후 상영업자에게 대여함으로써 해결되었다. 영구적인 상영이 가능하면서 영화를 즐기는 계층을 증가시켰고, 영사기의 향상으로 영사기 관련 기술자에 의존하지 않게 되면서 상설 상영 장소가 증가하였다.
니켈로디언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나면서, 영화는 전에 없는 성황을 누렸다. 하지만, 영화 산업 자체는 혼란스러운 상태였다. 이에 영화 제작회사들은 1908년 후반 영화특허권회사(MPPC 혹은 트러스트)를 조직함으로써 산업을 안정시키고 자신들의 이익을 보호하려 했다.
MPPC의 회원사들은 자신들의 영화에 피트당 표준가격을 정하는데 동의하였고, 각 스튜디오는 정해진 스케쥴에 따라 1~3릴의 영화를 출시하기로 하는 등 영화의 출시를 조정했다. 영화거래소에는 영화를 대여하였고, 허가받은 상영업자들만이 영화거래소에서 영화를 임차할 수 있었다. 트러스트의 시장 지배력에 외국 영화의 경쟁력이 약화되면서 소설 각색과 역사물 제작 의지에 영향을 주기도 했다.
1910년 MPPC는 제너럴 필름 사 라는 별도의 배급 회사를 조직하였고, 특정 지역내의 상영업자를 미리 정함으로써 불필요한 경쟁을 줄이는 구역 제한을 제도화했다.
이러한 MPPC의 정책에 반하여, 허가 받지 않은 많은 영화 거래소와 니켈로디언에 영화를 공급하는 <독립> 제작사들의 강건한 조직이 생겨났다. 이러한 독립 제작사들의 조직은 MPPC의 관행을 모방하였고, 1911년에 이르러 2개의 과점체가 미국 영화 산업을 통제했다.
1909년부터 영화 제작사들은 자신들의 영화의 스타배우들을 고용했고, 이를 이용해 영화를 홍보하는 시스템을 갖추었다.
미국 산업과 마찬가지로 프랑스 산업도 1907년과 1908년 사이에 확실한 궤도에 올랐다. 영화관의 눈의 띄는 증가와 영화를 전문으로 다루는 일반 신문 기사의 등장이 그 사실을 분명하게 나타냈다. 파테사와 고몽사가 시장을 주도하였다.
이탈리아 영화 산업은 초창기에 뤼미에르 영화사에 지배당하면서 늦은 출발을 보였다. 하지만, 사극 영화를 중심으로 발전 속도가 향상되었고 1908년에는 그 입지를 굳히고 세계 시장에서 미국과 프랑스와 경쟁하게 된다. 이탈리아 역사를 다루거나 문학의 걸작을 각색한 사극 영화는 이탈리아 영화에 차별성을 주었고, 손쉽게 세계 시장에 진입할 수 있게 하였다.
영화 제작
초창기 영화 제작은 협업적이었으나 감독의 출현과 동시에 각각 전문분야로 분업화가 시작되었다. 제작팀 단위로 영화를 제작하기 시작했다.
이 시기 미국 영화 산업은 속도와 양을 강조했다. 예술적이든 그렇지 않든 동일한 표준 가격으로 팔렸기 때문이었다.
1908년 바이오그래프 영화사는 그리피스를 감독으로 채용했으며, 본래는 배우들의 연기 예행연습을 지도하게 할 목적이었다. 그러나 점차 연기뿐 아니라 조명, 분장 등 영화 촬영의 총체적인 부분을 책임지게 되었다. 그리피스는 기존의 것들을 계속해서 바꾸었다. 자기 나름의 전속 단원들을 꾸렸고, 스토리 부서와 밀접하게 작업하고, 수뇌부들이 부정적이던 예행연습을 충분히 하도록 하였다.
내러티비의 시작
1907년경에는 영화의 내러티브의 명료성에 대한 문제가 제기되었고, 곧 조명, 구도, 편집 등 모든 것이 점차 관객이 스토리를 따라가는데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고려되게 되었다. 연기 양식, 편집, 삽입 자막의 대사 등을 통해 창조된, 심리적으로 개연성이 있는 인물이 스토리에 통합되었으며, 이들의 동기와 행동은 사실적으로 보이며 영화의 개별 숏이나 장면들을 한데 연결시키는 도움이 되어야 했다. 이는 당시 유행하던 사실주의적 소설과 연극의 등장인물을 따른 것이다.
편집 기법의 발전과, 카메라와 배우 사이의 거리가 줄어드는 것은 과도기 시기의 영화와 그전 시기의 영화를 구별하는 확실한 차이였다. 과도기 시기 초기에는 <9피트 라인>을 사용하였고, 1911년에 이르러 스리쿼터 숏을 사용하였다.
연기자와 카메라 사이의 거리가 줄어들면서, 관객이 배우의 얼굴을 잘 볼 수 있으며, 스타시스템의 발전에 도움이 되었지만, 등장인물의 개성적인 차별성과 얼굴 표현을 강조하는데도 기여하였다. 편집 또한 심리적으로 격렬한 순간을 강조하고 등장인물의 사고와 감정을 외면화 하도록 발전하였다.
현재와 과거 숏을 동시에 보여주거나, 등장인물이 본 것을 보여주는 시점 숏 등의 편집 기법이 발전하였고, 이러한 기법들은 등장인물의 사고를 외면화할 뿐만 아니라 시공간적 맥락을 설정하는데 도움이 되었다. 그리고 초창기 시기의 시각적 쾌락을 위한 분석적 편집은 과도기 시기에는 서사적으로 중요한 세부를 강조하기 위해 사용되었다.
그리피스는 교차 편집, 평행 사건, 평행 편집 등으로 유명했다. 그리피스 이전의 영화들에서 평행 편집은 이미 있었지만 그리피스는 이를 더 발전시켜 관습으로 확립시켰다. 또한 그리피스는 영화 1편을 점차 많은 수의 숏으로 구성하였다.
유럽감독들은 미장센과 깊이 있는 공간 연출의 가능성에 관심을 기울였다. 연극에서는 불가능한 깊이 있는 공간 감각을 창조하기 시작했다. 카메라의 위치를 낮추어 전경, 중경, 후경으로 장면을 연출할 수 있게 되었고, 공간적 깊이의 환영을 낳았다.
미장센보다 편집을 강조하는 미국 영화는 개연성 있고 개성화된 등장인물의 창조에 기여한 새로운 <영화적> 연기 스타일과 관계가 있다. 연극적인 과장되고 작위적인 연기방식을 버리고, 사실적이고 일상적인 행동으로 바꾸고, 안면 표현과 작고 개성적인 동작, 소도구 이용을 통해 등장인물의 생각과 감정을 외면화 하였다.
과도기의 삽입 자막 사용의 변화도 개연성 있고 개성 있는 인물의 창조와 직접적으로 관련이 있다. 원래 장면의 앞에서 사건을 설명하는 해설로 사용되던 삽입 자막은 장면의 중간 중간에 넣는 훨씬 짧은 해설적 자막들로 대체되었다. 그리고 1910년에는 대사 자막이 등장하였고, 처음에는 숏 앞에 배치하던 대사 자막을 숏 뒤에 배치하였다. 이것은 대사와 등장인물을 밀접하게 연관시키는 효과를 가져왔으며 등장인물을 좀 더 개성 있게 만드는데 도움이 되었다.
미국 영화의 형식적 요소들이 발전할 때, 내용의 소재 역시 변화를 겪었다. 숏을 연결하기 쉬운 코미디가 픽션의 70%를 차지하던 것이 여러 수단의 발전에 따라 다른 장르의 번성을 가져왔다. 다양한 장르가 번성하면서 <고급> 영화로서 영화의 문화적 위신을 세우고자 노력하기도 했다. 이에 따라 수많은 고급 영화들이 제작되었다.
상영과 관객
스토리 영화가 출현하면서 영화 산업은 공공 기관과 민간 사회 정화 조직으로부터 공격받게 된다. 곧 당국이 영화를 검열하고 상영 장소를 규제해야 한다는 주장이 대두되었다. 이에 영화 산업은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문학과 연극에 대한 모방, 문학적이고 역사적이고 성서적인 내용물의 제작, 자기 검열과 청결한 상영 장소에 대한 협조로 대응하였다.
상영관의 비위생적이고 위험한 시설과 여성과 아이에게 비도덕적인 영화의 노출의 심각성이 대두되면서 영화 산업은 공공기관 등으로부터 상영 장소 규제와 검열을 받게 되었다. 이에 영화 산업은 영화가 무해하며 재미있는 오락을 제공하고 있다는 증거를 제시하면서 영화를 규제하려는 사람들과 우호적인 관계를 형성하고자 노력했다. MMPC와 같은 유력한 구성원들은 상영관의 신축과 개축에 협력했다. 이에 따라 상영관은 개선되어 갔고, 1913년 <영화궁전>이 선보였다.
독일에서도 비슷한 규제들이 시작되었고, 영화의 오락적인 목적을 비난하고 교육 목적의 과학 영화의 제작 증대를 촉구했다. 1907년에는 영화개혁운동과 함께 다양한 분야의 문제를 다루는 문화 영화를 제작하도록 영화업계를 설득하는데 성공하였다.
이렇게 영화 산업은 영화에 대한 비난과 공격을 받아서 한 단계 더 발전하며 성숙한 모습을 갖추며, 적극적으로 사회적 인정을 얻고자 했다.
에필로그 : 장편 영화로의 이행
1913년에 이르러 사회적 인정을 확보하고자 하는 미국 영화 산업의 전략은 효과를 발휘하기 시작한다. 관객은 호화로운 영화관에서 편안히 영화를 감상하게 되었다. 그리고 영화들 또한 변하기 시작했는데, 1908년 전혀 다른 형식적 요소들의 채용에 이어 1912년에 들어서는 좀 더 길이가 길어진 스토리가 제작되었다. 몇 년 후 1917년에는 스튜디오에서 좀 더 긴 내러티브 구축에 대한 요구를 수용하고 영화는 1릴에서 평균 60분에서 90분 길이로 늘어났다. 그리고 이러한 좀 더 긴 영화를 장편영화라고 불렀다. 장편 영화는 수입 영화뿐만 아니라 복수 릴의 영화에서 시작되었다. 한 예로 1909~1910년 바이타그래프 영화사가 제작한 ‘모세의 일생’은 5개의 릴로 구성되었다.
기존의 배급과 상영 관행은 복수 릴 영화로의 전환에 장애가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이탈리아 영화는 장편 영화로 전환할 수 있었던 원동력을 제공하였다. 복수 릴의 외국 수입 영화는 니켈로디언에서 보다는 적법한 극장과 오페라 하우스에서 상영되는 극장용 특작으로서 <독점 상영>되었다. 특히 그 수익성과 인기 때문에 미국 산업으로 하여금 좀 더 긴 영화로써 경쟁하도록 만든 것은 이탈리아 스펙터클 사극이었다.
그리피스의 ‘국가의 탄생’은 장편 영화를 예외적인 것이 아니라 표준으로 확립하기 시작한 영화이다. 이 영화는 길이와 스펙터클에서 이전의 모든 장편 영화를 뛰어넘는 것이었다. 그리피스는 영화의 상영에도 공을 들여 가장 큰 규모의 영화관에서 40개의 악기로 구성된 호화 오케스트라의 연주와 함께 상영되었다. 또한, 브로드웨이 연극의 입장료와 동일한 2달러로 영화를 진지하게 받아들이도록 하였다.
초기 장편 영화의 내러티브 구조는 당시의 1릴 영화의 그것들과 상당히 닮은 것이었다. 그러나 영화 제작자들은 곧 장편 영화에 필요한 고유의 내러티브, 인물, 편집 유형 등을 배우기 시작했다. 이에 다시 연극과 소설에 의존하여 영감을 얻어냈고, 점점 장편 영화는 하나의 주요 스토리에 모두 연관되는 좀 더 많은 등장인물, 사건, 주제 등을 포함하기 시작했다. 하나의 클라이맥스 혹은 여러 개의 비슷한 강도의 클라이맥스들 대신 장편 영화는 여러 개의 작은 클라이맥스와 모든 내러티브 주제들이 해소되는 하나의 대단원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그러나 이전 영화들의 기본적 요소들은 그대로 남아 있었다. 다만 등장인물의 동기와 개연성을 위해 신을 구성하기도 하고, 대사 삽입 자막이 증가하고, 카메라가 배우에게 더 다가가는 식의 장편 영화에 맞는 발전이 이루어졌다.
10년 동안의 본질적인 격변을 거쳐 <과도기> 시기가 끝나가는 1917년 무렵에, 영화는 20세기의 주도적인 매체로서 새로운 성숙의 단계에 들어갔다. 영화는 다른 매체를 계속 참조하는 과정 속에서 다른 매체에 대한 의존을 벗어났으며, 이제 영화적인 장치를 통하여 영화적인 스토리를 말할 수 있게 되었으며, 그 장치들은 점차 표준화되고 관습화 되었다. 제작 관행의 표준화는 다른 자본주의 기업들과 조화를 이루고, 장편 영화라는 믿을 수 있는 작품의 생산을 보증했다. 좀 더 화려한 영화 궁전은 매체가 획득한 사회적 정당성을 반영했다. 그렇게 할리우드 영화의 도래를 위한 모든 준비가 완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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